반 고흐(2) <귀자른 자화상>

동상이몽이었다. 예술사상 가장 유명한 동거, 고갱과 고흐의 '옐로우 하우스'에서의 60일은 서로 다른 속셈으로 시작됐다. 

고갱은 고흐의 동생 '아트 딜러' 테오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어 1888년 10월 노란색으로 칠한 고흐의 화실로 향한다. '형의 화실로 가달라'는 테오의 제안을 받아들이면 '자신의 그림을 좋은 값에 팔아줄 것'이라는 계산이 있었다. 반면 고흐는 이미 화가로 유명세를 타기 시작한 고갱과의 '화가공동체'를 통해 인정받는 화가로 성장 하려는 꿈을 꾸고 있었다.

빈센트 반 고흐, <귀에 붕대를 맨 자화상>, 1889, 캔버스에 유채, 60×49㎝, 코톨드 갤러리, 런던

시작은 좋았다. 새로운 그림재료를 실험하기도 하고, 서로의 그림을 평하며 의미있는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하지만 시골 마을의 좁은 작업실에서 개성이 뚜렷한 2명의 천재화가가 공동작업을 한다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고흐가 생각한 '화가공동체'의 이상은 현실과의 괴리가 컸다. 그림 스타일이 뚜렷하게 달랐던 두 화가의 대화는 언쟁으로 번지며 자주 충돌했다.

그러던 어느날, 두 사람의 그림 가운데 '고갱의 그림만 팔렸다'는 소식이 파리에서 날아온다. 낙심한 고흐를 보고 마음이 쓰였던 고갱은 '위로'의 뜻으로 고흐의 초상화를 그려 주기로 한다.

1888년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이브. 그 유명한 '고흐의 귀 절단 사건'은 완성된 초상화를 받아 든 고흐의 행동에서 시작된다. 고갱이 그린 자신의 초상화를 본 순간 피가 거꾸로 솟구친 고흐는 '자신을 흐리멍텅한 눈빛의 재능없는 화가로 묘사했다'며 격분해 캔버스를 집어 던졌다.

고갱은 평소 테오의 부탁으로 마지못해 머물고 있다는 느낌을 고흐에게 보여 온 터였다. 그렇기에 고흐는 고갱이 떠날 것을 우려해 늘 불안했다. 마음이 여리고 신경이 쇠약했던 고흐는 이 일을 '자신에 대한 모독'이라고 생각했다. 고성이 오갔고, 그들은 건너지 못할 강을 건너게 된다.

욱하는 성질의 고흐를 더 이상 봐 줄 수 없었던 고갱은 '신물 난 이곳을 떠나겠다'고 선언한 뒤 화실을 나가 버린다. '다시 혼자가 될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고흐는 고갱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싶었을까. 하지만 뒤따라 나간 그의 손에는 면도칼이 들려 있었다. 차마 고갱에게 휘두를 수 없었던 칼끝은 자신을 향하게 되고, 피범벅이 된 고흐는 갈 곳을 헤매다 인근에 사는 창녀에게 잘린 귓조각을 건낸다. 이를 수상히 여긴 그녀가 경찰에 신고하면서 자칫 묻힐 수도 있었던 사건이 세상에 드러나 미술사에 길이 남을 전설이 된다.

혼자 남겨진 고흐. 거울을 바라보던 그는 붕대를 감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그리기 시작한다. 요즘 유행하는 '인증샷'의 차원일 수도 있겠다. 이렇게 그려진 '귀 자른 고흐의 자화상'은 오늘날 그를 사랑하는 많은 이들에게 수많은 상상을 제공하며 예술사를 풍성하게 만들고 있다.

■ 조경희 미술팀 전문위원 = 충북대학교 사범대학에서 미술교육학을 전공한 뒤 동 대학원에서 미술교육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충북 단양군에서 교편을 잡은 뒤 미술교사로 재직하면서 충북대학교 미술학과에 출강하며 후배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현재 서울 성수고등학교에 근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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