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스 홀바인 '대사들'

▲ 한스 홀바인 '대사들', 1533년, 패널에 유채와 템페라, 207×209.5㎝  ⓒ 영국 런던 내셔널 갤러리
▲ 한스 홀바인 '대사들', 1533년, 패널에 유채와 템페라, 207×209.5㎝ ⓒ 영국 런던 내셔널 갤러리

두 사람은 지금 런던에 와있다. 발밑에 웨스트민스터 대수도원에서만 사용하는 문양이 그 증거다. 교황 클레멘스 7세의 요청으로 프랑스 왕 프랑수아 1세가 파견한 대사다. 미션은 영국 왕 헨리 8세와 왕비 캐서린의 이혼을 막는 것. 당시 교황은 '신 앞에서 맹세한 결혼의 서약을 깰 수 없다'는 핑계로 이혼을 반대했다.

캐서린 왕비는 스페인 왕 페르난도 2세의 딸로 신성 로마제국 황제 카를 5세의 이모였다. 교황은 카를 5세의 막강한 권력 앞에서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형 아서가 죽은 후 6살 연상 형수와 결혼한 헨리 8세는 왕비가 아들을 낳지 못하자 튜더 왕조의 대를 이을 후계자 문제를 명분으로 캐서린에게 이혼을 요구했다. 여기엔 앤 불린을 향한 헨리의 눈에 이미 단단히 콩깍지가 씐 때문이기도 했다.

▲ 핸리 8세의 초상.

이혼은 간단치가 않았다. 1517년 독일의 마틴 루터에 의해 종교개혁이 시작된 지 10여년이 지났지만, 유럽 국가 대부분이 구교인 가톨릭의 발아래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아직은 교황의 권위가 살아있는 시기였다.

이제 막 젊고 어여쁜 여인과 사랑의 불길이 당겨진 남자에게 교황의 반대는 '성가신 참견'에 불과했다. 이 와중에 프랑스 특사가 런던에 도착한 것이다. 멋진 옷을 입은 대사들은 우리의 독립투사들이 '거사'를 치르기 전 사진기 앞에서 기록을 남기듯 당당하게 포즈를 취하고 있다.

독일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화가 한스 홀바인(Hans Holbeinㆍ1497~1543)은 영국의 장관이던 친구 토마스 모어의 주선으로 영국 왕 헨리 8세(1491~1547)의 궁정화가로 초청돼 이 그림을 그렸다.

이들 대사는 실제 인물로 외교관 장 드 댕트빌(왼쪽)과 조르주 드 셀브 프랑스 대주교다. 입고 있는 옷, 선반에 놓인 물건은 두 사람의 신분과 교양수준을 드러내는 장치다. 나이에 비해 중후해 보이는 이들은 명망있는 가문 출신으로 각 분야의 실력가들이었다.

▲ 성공회 탄생의 계기가 된 헨리 8세의 두번째 부인 앤 불린.

지구의, 천구의를 비롯한 각종 기구들은 당시 과학발전의 수준을 나타낸다. 십각면 해시계는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1492년에 맞춰져 있고, 나침반과 함께 지리상 발견의 시대라는 것을 입증하고 있다. 찬송가책은 가톨릭 찬송가 가운데 루터파가 받아들인 곡이 보이도록 펼쳐져 있고, 그 위에 줄이 끊어진 악기 류트가 놓여있다. 끊긴 줄은 둘로 나뉜 신교와 구교를 의미한다. 신교와 구교가 저 찬송가처럼 다시 화합하기를 기원하는 은유적 표현이다.

▲ 한 홀바인의 '대사들' 부분(바게트 빵 같이 생긴 것은 해골을 왜곡되게 길게 그린 것)
▲ 한 홀바인의 '대사들' 부분(바게트 빵 같이 생긴 것은 해골을 왜곡되게 길게 그린 것)

바닥에는 뜬금없이 바게트 빵 같이 생긴 물체가 떠 있다. 관람자가 화면 오른쪽으로 걸어가 대주교 옆에 서서 몸을 낮춘 뒤 비스듬한 각도로 내려다보면 이 괴상한 물체의 정체가 드러난다. 해골이다. '바니타스 회화'에 빠짐없이 등장하는 해골은 '죽음을 기억하라(Momento Mori)'는 경고의 메시지를 우리에게 보낸다. 인간은 누구나 죽음을 피할 수 없기에, 신의 피조물로서 항상 겸손하고 가치 있게 살라는 주문이다.

화면 왼쪽 맨위 커튼 끝자락에 숨은그림찾기처럼 보일 듯 말 듯 걸려 있는 예수 십자고상이 보이는가. 이 고난의 십자고상은 세상의 모든 지식과 권력을 섭렵한다 하더라도 인간은 신의 의지를 벗어날 수 없음을 암시한다. 이것은 그림에 등장하는 모든 '알레고리(Allegory)'의 핵심으로 대사뿐만 아니라 그림을 보는 모든 관람자에게 내리는 '신의 계시'인 듯하다.

▲ 한스 홀바인의 '대사들' 부분(붉은 화살표 부분에 예수 십자고상이 숨어있다)
▲ 한스 홀바인의 '대사들' 부분(붉은 화살표 부분에 예수 십자고상이 숨어있다)

사춘기가 늦게 찾아 온 어른이 흔히 그렇듯 헨리 8세는 작심하고 엇나갔다. 패기왕성한 젊은 왕은 국교를 아예 개신교인 성공회로 바꾸고 스스로 영국 교회의 수장이 된다. 교황은 파문으로 보복했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이렇게 대사들의 미션은 실패로 막을 내린다.

종교개혁을 단행하면서까지 앤 불린과의 결혼을 강행한 헨리 8세는 고대하던 아들을 얻었을까. 앤은 딸 엘리자베스 공주만 낳았을 뿐 아들을 낳지 못했다. '세기의 스캔들'을 일으키며 첫딸 메리 공주를 사생아로 전락시켰던 헨리 8세의 득남을 위한 노력은 물거품이 됐다.

'내가 이럴려고 종교개혁까지 해가며 앤과 결혼 했나'라는 자괴감이 든 헨리는 급기야 앤을 처형하기에 이른다. 그렇게 고대했던 아들은 헨리의 세 번째 왕비인 제인 시모어에게서 얻는다. 안타깝게도 출산 직후 제인 시모어가 죽고, 그 뒤로 세 명의 왕비와 결혼하지만 신은 더 이상 헨리에게 아들을 허락하지 않았다. 애석하게도 에드워드 왕자 하나로 만족해야 했다.

▲ 헨리 8세의 첫번째 부인 캐서린의 딸 메리 1세.

자신의 뜻에 따라 강한 군주정치를 구현했던 헨리는 후사 문제 만큼은 신의 뜻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헨리 8세가 죽은 뒤 왕이 된 에드워드가 16살에 후사 없이 세상을 뜨자 왕위계승 서열 1위이자 캐서린의 유일한 핏줄인 메리가 여왕으로 컴백한다. 여왕이 된 메리는 어머니 눈에서 피눈물을 쏟게 한 성공회 개신교도를 차례로 숙청하며 한풀이를 했다. 메리 여왕 치세의 영국은 그렇게 구교인 가톨릭으로 회귀한다. '블러드(Blood)메리'라는 여왕의 별명은 이때 만들어졌다.

메리가 그토록 구박하던 이복동생 엘리자베스는 어떻게 됐을까. 신의 깊은 뜻 앞에 또 한 번 놀랄 차례다. 메리 여왕도 동생 에드워드처럼 후사 없이 죽음을 맞게 된 것이다. 임종을 앞둔 여왕은 운명을 예감한 듯 엘리자베스를 후계자로 지명하고 눈을 감았다. 여왕이 된 엘리자베스, 왕관을 쓴 그녀의 눈에서 회한의 눈물이 흘렀으리라. 영국의 국교는 그녀의 뜻대로 성공회로 복귀한다. 자신의 어머니인 앤을 왕비로 만들어준 성공회는 엘리자베스 여왕이라는 존재의 근거였기에 이는 당연한 결과였다. 영국의 성공회는 그렇게 오늘에 이른다.

▲ 핸리 8세의 두번째 부인 앤 불린에게서 탄생한 엘리자베스 1세.

엘리자베스 여왕은 결혼을 요구하는 의회에 대해 "나는 이미 남편에게 봉사하고 있으니 그분은 잉글랜드 왕국입니다"라는 명언을 남겼다. 평생 결혼을 하지 않은 엘리자베스 1세를 끝으로 튜더 왕조는 막을 내린다. 왕조의 대를 잇기 위해 6번이나 결혼을 했던 헨리 8세의 의지는 신의 뜻 앞에 그렇게 맥없이 허물어졌다.

■ 조경희 미술팀 전문위원 = 충북대학교 사범대학에서 미술교육학을 전공한 뒤 동 대학원에서 미술교육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충북 단양군에서 교편을 잡은 뒤 미술교사로 재직하는 동안 충북대학교 미술학과에 출강하며 후배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현재 서울 성수고등학교에 근무하고 있다. ⓒ 세이프타임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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