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년불만백(生年不滿百) 상회천년우(常懷千年憂)' (인생은 백년도 안 되는데 언제나 천년의 근심을 품고 있다.) 

중국 한(漢)나라 때 민간에 유행하던 노래 서문행(西門行)에 수록된 작자 미상의 한시(漢詩)로 '쓸 데 없는 걱정을 하지 말고, 현재를 즐겨라'를 주제로 한 시의 일부분입니다.

이 시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도 포함돼 있습니다. '우자애석비(愚者愛惜費) 구위진세치(俱爲塵世嗤)' (어리석은 자는 돈을 아끼지만, 그 또한 세상의 웃음거리)  

노래에 담긴 생각과 달리 시를 읽으면서 '백년도 안 되는 인생이지만 천년의 전망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인간의 특권 아닌가'라는 생각을 해 봅니다.

지속 가능한 발전이라는 천년의 전망으로 인해 백년도 못 가는 제 한 몸에 갇히지 않고 제 몸을 벗어난 먼 후대까지 생각하며, 하나님이 주신 역사적 의미와 가치를 우선적으로 따를 수 있기에 '하나님의 형상이 깃든 인간'이라고 불리는 것 아닌가요.

근심이 좋은 것은 아니지만 꼭 나쁜 것만도 아닙니다. 이것이 자기 자리에 있으면서 숙성되고 축적돼 역할을 제대로 하면 전망(展望)이 됩니다. 그런 면에서는 근심도 꽤 쓸모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지 못하고 자리를 벗어나면 상회우(常懷憂ㆍ모든 것이 항상 고통)나 진세치(塵世嗤ㆍ세상의 웃음거리)가 돼 오히려 삶을 갉아 먹습니다.

▲ 정이신 아나돗학교 대표간사ㆍ아나돗공동체 목사

백년도 못 살면서 천년의 근심(千年憂)을 하는 이유야 여러 가지가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시구를 보면 돈에 대한 지나친 염려 때문에 결국 한 시간의 고민이 하루의 고민이 되고, 이어 일년의 고민이 되며, 나아가 천년으로 폭증되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살아가고 만들어가며 채워가야 하는 생의 이야기에서 돈이 없어도 할 수 있는 일이 꽤 많은데, 굳이 돈으로만 모든 것을 하려다 보니 촌각의 근심이 만년의 우울로 이어질 뿐 전망으로는 바뀌지 않는 것 같습니다.

자기가 원하지 않았는데, 생각하지도 못했던 시간에 갑자기 시작하게 됐다고 모두 생(生)을 울음으로 시작합니다.

그렇지만 계속 울 수는 없는 법이기에, 울음으로 시작된 근심을 전망으로 바꿔야 하고, 자기에게 주어진 시공간에 전망이 가져다 준 기쁨도 채워 넣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아무리 빨리 흘러가는 생의 시계를 지니고 살지라도 구약성경의 모세처럼 살아 온 시공간을 하루씩, 하루씩 헤아려 보는 지혜도 필요합니다(시편 90:12).

어떻게 행동했을 때 가장 나답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어떻게 살아야 인간다운 것인지를 역사의 교훈과 자신에게 늘 물어봐야 합니다. 이런 물음이 있어야 근심이 전망으로 변환됩니다. 역사가 다시 찾아오는 '너 자신'이 만들어집니다(Be Yourself).

전망에서 파생된 경쟁력은 속도에 있지 않습니다. 따라서 천년의 근심에 밀려 허둥지둥 대며 사는 것을 능력이 좋아 빠르게 사는 것이라고 착각하면 안 됩니다.

과속은 다른 얼굴로 변장한 근심일 뿐이기에 오히려 속도를 제어하는 능력으로 전망의 범위를 넓혀야 합니다. 또한 자기 속도로 가야 합니다. 사람에게는 저마다 천 년의 전망을 볼 수 있도록 주어진 연수(年數)와 그에 걸맞은 삶의 속도가 있습니다.

사람은 대부분 백년도 못 채우고 가는 몸으로 삽니다. 그렇지만 마음만큼은 지속 가능한 천년의 전망을 담고 있어야 합니다. 가야 할 방향으로 내야 할 속도를 내며 이 전망으로 살았다는 것은 누구에게 양도하거나 빼앗길 수 없는, 하나님이 주신 복입니다.

■ 정이신 논설위원ㆍ목사 = 한양대 전기공학과와 백석대학교 신학대학원을 졸업했다. 한국독립교회 및 선교단체연합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아나돗학교 대표간사와 아나돗공동체 목사다. 독서와 글쓰기를 주제로 한 <노희(路戱)와 더불어 책(冊)놀이>를 연재했으며 논설실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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