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는 우리말에 비해 문장 성분을 생략하는 경우가 드뭅니다. 나를 지칭하는 아이(I)가 문장의 처음에 나오지 않고 다른 곳에 나와도 늘 이를 소문자로 쓰지 않고 대문자로 씁니다.

대학교에서 영어를 공부하던 시절 선생님은 프랑스어(je)나 독일어(ich)와 달리 영어가 나를 지칭하는 'I'를 늘 대문자로 쓰는 이유는 '나'라는 인간의 자아 정체성을 확연히 드러내려는 사고방식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오늘날 자아 정체성은 성숙한 인간을 가름하는 척도가 되기고 하고, 정신질환을 앓는 환자들의 치유상태를 가름하는 기준이 되기도 합니다. 저는 서양에서는 근대철학의 문을 열며 생각하는 인간을 상정한 데카르트(René Descartes)로부터 자아정체성이 본격적으로 탐구되었다고 봅니다.

그런데 이에 대한 동양과 서양의 접근 방향은 달랐습니다. 동양은 주어진 공동체 속에서 자아정체성을 찾았고, 서양은 개인의 자아정체성을 먼저 확보한 후 이를 통해 공동체의 역할과 기능을 규정하는 방식을 추구했습니다.

프로이트(Sigmund Freud)는 인간이 의식보다 무의식에 의해 지배받는 존재라고 했습니다. 그의 학설에 의하면 인간의 의식은 무의식에 비해 사고과정에서 너무 적은 역할만을 합니다.

그런데 사고과정을 폭넓게 지배하는 무의식을 인간이 제대로 알 수 없다는 것이 자아정체성을 파악하는 일에 커다란 파문을 일으켰습니다.

그의 주장을 따라가 보면 인간이 자기가 지니고 있는 무의식의 세계를 다 알 수 없으니, 자아정체성을 알아간다는 것은 돌멩이를 하나 세워 놓고 집을 지었다고 주장하는 형국과 같아져 버립니다.

종교가 가진 훌륭한 기능 중의 하나가 인간의 가치를 존중하는 사고방식입니다. 인간이 자아정체성을 무의식을 통해 확보하든, 의식을 통해 확보하든 종교는 인간이 지닌 고유한 가치를 존중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물론 일부에서는 하나님의 존재 증명 여부가 불가능하다는 점을 들어 기독교가 주장하는 인간 선언을 폄하하는 발언을 내놓기도 합니다.

그러나 종교라는 사회ㆍ문화현상이 없어질 수 없는 것이고, 종교가 타락했던 시대치고 제대로 사회가 돌아갔던 적이 별로 없었던 인류 역사의 교훈을 통해 보건대 기독교가 스스로 선언한 인간의 길을 가도록 옆에서 도와주는 것도 나빠 보이지는 않습니다.

▲ 정이신 아나돗학교 대표간사ㆍ아나돗 공동체 목사

성경이 펼치는 자아정체성에 대한 교훈에 따르면 하나님이 인간을 작품으로 만드셨기에 유일무이(唯一無二)하지 않으면 인간이 아닙니다. 또한 상품은 판매대에 진열돼 주인의 선택을 기다려야 합니다만, 작품은 스스로가 주인이기에 자기의 특징을 홍보해 줄 관리인을 찾습니다.

그런데 이때 탐욕은 작품인 인간에게 유일무이적인 성격을 잠시 접어 두고 집단적 본능에 충실하여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상품으로 살아보라고 유혹합니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모양과 형상이, 내가 꾸고 있는 꿈을 이루기 위해 걸어간 나의 책임 있는 발걸음이 나를 유일무이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나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내가 꾸었던, 꾸고 있는 꿈은 나를 작품답게 살도록 이끕니다.

설령 옆 사람과 같은 꿈을 꾸었다고 해도 걸음의 폭과 기억은 서로 다르기에 이로 인해 나는 상품이 아닌 작품이 됩니다.

상품은 팔아야 하기 때문에 가격을 매깁니다만, 작품은 오히려 그것을 지닌 이의 품격을 높여주기에 가격을 매길 수 없습니다. 설령 가격을 매긴다고 해도 그것은 진열된 작품을 사람들이 구별하기 위한 수단으로 그리할 뿐 작품에는 진짜 가격이 없습니다.

■ 정이신 논설위원ㆍ목사 △한양대 전기공학과 졸업 △백석대학교 신학대학원 졸업 △한국독립교회 및 선교단체 연합회 목사 안수 △아나돗학교 대표간사ㆍ아나돗 공동체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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