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사 김정희 '세한도'

▲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 1844년, 종이에 수묵, 23×69.2㎝, 국보 제180호 ⓒ 국립중앙박물관
▲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 1844년, 종이에 수묵, 23×69.2㎝, 국보 제180호 ⓒ 국립중앙박물관

'의리'를 강조하는 시대적 의미는 의리를 찾아보기가 어려운 까닭에서 기인한다. 하버드대 마이클 샌델 교수의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한동안 정의에 대한 이슈가 화두에 오른 것도 같은 맥락이라 할 수 있다. 

<세한도>는 김정희(金正喜, 1786~1856)가 59세 때인 1844년(헌종 10년) 제주도 유배 당시에 그려졌다. 지위와 권력을 잃어버렸는데도 사제의 의리를 저버리지 않고 찾아온 제자 이상적(李尙迪, 1804∼1865)을 위해 그렸다.

추운 계절이 된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시들지 않음을 안다(歲寒然後 知松柏之後凋)

그는 공자의 논어(論語) 자한(子罕)편을 주제로 추위 속에 소나무와 잣나무가 청청하게 서 있는 모습을 화폭에 담아냈다.

추사체로 유명한 김정희(金正喜)의 자(字)는 원춘(元春), 호(號)는 추사(秋史), 완당(院堂). 백여 개의 호를 가진 당대 최고의 서예가이자 대학자였다. 시대의 변화를 감지한 의식 있는 신지식인으로 남달리 중인 출신의 제자를 양성했다. 그 중에 한 명이 이상적.

시문에 능한 당대 최고의 통역관인 이상적은 청에 사신으로 갈 때마다 사모하는 스승을 위해 최신 서적을 구해 제주도에 보냈다. 풍찬노숙을 하는 스승인 대학자에게 그만큼 좋은 선물이 없을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어렵게 구한 것들을 권력자에게 상납해 출세의 도구로 이용했을 법 했지만 그는 아무 힘도 없는 스승에게 보냈다. 책을 받아 든 스승은 유배 전과 다름없이 한 결 같은 제자의 정성에 가슴 깊은 곳으로부터 뭉클한 감동을 느끼지 않았을까.

평생 고생이란 걸 몰랐던 사대부 김정희에게 고된 유배생활은 견뎌내기 힘든 것이었다. 유배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친한 벗과 아내가 세상을 떠났고, 반대파 안동 김씨의 박해도 지칠 줄 몰랐다. 한양에서 친분이 깊던 이들에게서도 소식이 점차 끊겼다.

"사람들은 권력이 있을 때는 가까이 하다가 권세에서 물러나면 모른 척하는 것이 보통이다. 절해고도에서 귀양살이 하는 처량한 신세인데도 이상적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이런 귀중한 책을 보내주니 그 마음을 무어라 표현해야 할까."

그림의 중심에서 시선을 끄는 노송은 고고하지만 늙고 힘없는 김정희 자신을, 왼쪽에 푸릇푸릇한 젊은 잣나무는 제자 이상적을 상징하고 있다. 일체의 장식적인 요소를 배제하고 갈필로 최소한의 것만 간추려 그려낸 문인화(文人畵)는 더함도 덜함도 용서치 않는 까슬까슬한 선비정신이 필선에 그대로 드러난 걸작이다. 쓸쓸함과 비움의 미학이 있고, 추사의 심정이 살아 있다.

동양사상은 유난히 '불변의 진리'를 강조한다. 선비의 지조, 여인의 절개, 열녀문, 사육신, 생육신, 독립투사 등이 그 정점의 예다. 변함없음이 영원성을 획득하면서 교훈으로 삶 속에 녹아 우리의 인생에 적잖게 관여한다. 의리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며 생활신조로 삼기도 하지만 때로는 부담스럽기도 하다. 이상과 상황의 변수 속에서 지키기 어려운 가치이기 때문이다.

최근 한 고교에서 제자가 스승을 폭행하는 '황당한' 동영상이 SNS에서 화제가 됐다. 난세의 시류에 영합하지 않고 사제 간의 정과 의리를 지켜가며 학문과 사상의 지평을 넓혀가는 모습은 오늘날 우리 교육계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 조경희 미술팀 전문위원 = 충북대학교 사범대학에서 미술교육학을 전공한 뒤 동 대학원에서 미술교육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충북 단양군에서 교편을 잡은 뒤 미술교사로 재직하면서 충북대학교 미술학과에 출강하며 후배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현재 서울 성수고등학교에 근무하고 있다. ⓒ 세이프타임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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